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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국보 1호다 - 양주동 선생의 문주반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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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성 201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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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원고의뢰를 받아서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나오는 잡지에 실렸습니다..^^ 재미있게 읽어보시길 빌며... 나는 인간국보 1호다 - 양주동 선생의 문주반생기 국문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 궂이 아니더라도 무애 양주동 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한번쯤 들어 봤을겁니다. 자칭 인간국보 1호라고 자처했던 양주동 선생이지만 실제로도 1호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분이 바로 양주동 선생일겁니다. 일제시대 당시 향가 연구가로 한국의 국문학계에 군림해있던 일본인 학자 오구리 신페이에 학문에 유일하게 대적했던 이가 바로 양주동 선생이었는데 고가연구는 한국인이 유일하게 펴낸 향가주석 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구라 신페이의 향가주석서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특히 육당 최남선 선생은 “1백년 뒤에 남을 책은 이 책뿐이다”라고 극찬할 정도의 뛰어난 책이었지요. 거기에 고려가요의 주석서인 여요전주(고가연구 속편)는 우리나라 국문학계에서는 최고의 책으로 뽑아도 무방할 정도의 책들입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고전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시집인 조선의 맥박은 당시의 시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에 발행된 국문학고전독본은 고전교과서로서 한국전쟁 이후까지도 발행이 되어 많은 학생들의 고전문학지침서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영시백선은 영문학자로서의 그의 위치를 잘 알수있는 책이기도 하지요. 이렇듯 양주동 선생만큼 우리나라의 국문학계에 많은 족적을 남긴 이는 많지 않을껍니다. 국문학자로 영문학자로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활동은 자칭이 아닌 진실로 인간국보 1호로서의 그 가치를 충분히 평가 받을수가 있을겁니다. 양주동 선생은 1903년 개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일찍 선친을 여위어 그가 야학의 선생님으로도 활동을 했는데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일본으로 유학한 뒤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일제의 암울한 시대에 일본을 이기고 민족적인 자존심을 회복할수 있는 방법은 학문적인 성과를 내는 방법이라고 판단했기에 이후에 국문학 연구에 심취를 했습니다. 해방이후 한 여러 대학의 강단에 서기도 하는데 재치있는 언변과 뛰어난 강의로 많은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의 강의는 항상 제일 큰 강의실에서 진행이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서 듣는 학생들도 많았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그의 강의를 추억하고는 즐거워하시는 분들이 있을 정도니 과히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이 갑니다. 이런 양주동 선생의 재미있는 인생관을 엿볼수 있는 책인 문주반생기(文酒半生記)가 이번에 소개해드릴 책입니다. 문주반생기는 제목에서도 알수 있듯이 글과 술과 함께한 인생을 이야기 하고 있는 에세이 형태의 책입니다. 전반부에는 어릴적 문(文)을 공부하고 시를 짓고, 유학시절의 단상, 그리고 시잡지인 금성에 시를 실은 이야기등을 간단히 싣고 있습니다. 그 다음 편에는 초음기(初飮記)로 술의 장을 시작하고 있는데 이 글들이 바로 양주동 선생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문주(文酒)이야기를 풀려고 하는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지는 글들입니다. 양주동 선생은 먼저 술을 처음 크게 취했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침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서 내가 큰 사발을 들고 광에 침입하여 술독의 뚜껑을 젖히고 우선 한바탕 내음을 쾌히 맡아본뒤 몇사발을 연거푸 마음껏 퍼먹었다“ 중략 ”나는 그 뒤 반생에 내외, 청독, 유명, 무명의 온각주류를 마셔보았으나 그때의 그 청주와 같은 아름다운 빛 흐뭇한 향기, 쩽하고 쩌릿한 맛있는 술을 다시는 먹어본적이 없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봤슴직한 어릴적 음주의 기억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 글에서 양주동 선생의 재미있는 기질을 알수 있는 부분이 나옵니다. “모처럼 애지중지 열 살까지 길러오던 장래 일대<문호>가 될 그 영식(令息)을 진작 술독에 생매장하거나....” 음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를뻔 한 사건을 하나의 에피소드로 여긴것이죠. 그리고 <白酒會>라는 글이 눈에 띕니다. 백주회는 말 그래도 백가지의 술을 먹어보자고 만든 모임이죠. 양주동 선생의 곁에는 많은 문우(글친구)와 주우(술친구)가 있었었습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조집에 제를 써주기도 하고 몇 개월에서 1년 사이에 동거를 하면서 술을 즐기던 나도향 선생과 염상섭 선생의 일화등도 소개되어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일제 당시의 문단사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문인들의 작품들이 어떠한 상황에서 탄생이 되었는지 또는 작가들의 아픔을 절로 느끼면서 그들의 작품을 더욱 더 깊게 이해할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는 것이죠. 또 관심이 가는 인물과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곳이 있습니다. 호암 문일평 선생과 육당 최남선 선생과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는 부분인데요. 호암 선생은 일제시대 대표적인 교육자이자 언론가였는데 그와 함께 일본에서 유학을 할 때 같은 하숙으로 1년 가량 생활을 했습니다. 술을 마실 때에는 값이 싼 야끼도리집(꼬치집)에서 자주 먹었다고 합니다. 양주동 선생은 장난기가 심하여 자신이 먹은 대꼬치를 바닥에 떨어뜨립니다. 그러면서 호암선생에게 자신의 재주를 자랑하듯이 쳐다보면 호암 선생은 눈을 깜빡거리기도 하고 홑기기도 하지만 양주동 선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 호암 선생은 허리를 구부려 땅에 떨어진 대꼬치를 들어서 식탁위에 정리를 했다고 합니다. 이 글에서는 기인 기질이 있는 자신을 낮추며 호암 선생의 정직함과 정의로움을 이 글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뿐만 아니라 최남선 선생과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육당 선생의 시집인 백팔번뇌는 <조선>이란 <임>에게 바친 뜨거운, 뿌리깊은 사랑과 괴로움의 노래로 엮어진 대표작 시조집으로 조그만 책자이나 시조사상의 한 중흥 기념탑이 될만한 역작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곧 이 문주반생기라는 책은 자신의 곁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민족주의자들의 곧음과 그들의 작품에 대한 평가등을 싣고 있는 그야말로 한국학 백과사전이라고 해도 무방할것입니다. 이 외에도 청춘백서, 학창기등의 장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교단시절에 있었던 학생들과의 재미있는 일화등도 실려 있습니다. 이 모든 글을 읽다보면 이 “문주반생기”라는 책의 소개가 일반적으로 아주 가볍게 되었다고 느껴지곤 합니다. “문(文).학(學).교단(校壇) 40년의 회상“이라는 부제에서 알수 있듯이 이 글에는 양주동 선생의 인생이 담겨져 있는 진서(珍書)라고 느껴집니다. 특히 후기에 그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를 이야기 하며 이 책에 대한 자신의 단상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자신의 이 글이 정말로 문이라 할수 있는지, 그리고 이 책을 전반기의 회상으로 보고 후반기를 다시 적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평가가 필요할 것이라는 것등입니다. 자칭 인간국보 1호라고 호언을 한 양주동 선생의 글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겸손의 글이 아닌가 합니다. 아니 자신을 국보라고 칭한 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을 좀 더 낮추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까요? 정말로 뛰어난 국문학자 양주동 선생의 행동과 말 하나 하나가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큰 산으로 다가오는지는 이 책을 다 읽은 후 생각해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양주동 선생이 번역한 에머슨의 시를 끝으로 소개를 마칩니다. 봄이 오면 맘속에 <봄>은 또다시 나이는 예순을 센다 하여도 울렁이는 이 가슴을 <사랑>이 깨워 우리는 영영 늙지 않으리 차디 찬 겨울의 영하 위에도 여름이 빛남을 나는 보옵네 길길이 쌓여진 눈 더미 속에 따스한 장미 싹 그 밑에 있네 에머슨의 세계혼(世界魂 THE WORLD-S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