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동 책방골목과의 추억은 내 부끄러운 기억으로 시작된다. 그 기억을 저만치 밀어놓고 나의 보수동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이 부끄러운 고백부터 고해성사라도 하고 넘어가야 할 듯싶다.
보수동 책방골목은 중2때부터 가기 시작했는데, 성장기에 따라서 내가 그곳에서 찾는 책들이 달랐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보수동 골목은 내 평상시 생각보다는, 나의 성장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듯 하다.
중학교 때야 그저 참고서를, 그리고 자주도 아닌, 일년에 몇 번 정도 보수동에 가곤 했었다.
새 학기가 막 시작되어, 새로운 반친구들 보다 예전 반친구들이 더 많은 초봄 어느 날, 그날은 내가 눈에 뭐가 씌어도 단단히 쓰인 날이었던 모양이었다. 공부도 잘 못하면서, 그것도 특히 수학에는 젬병이었던 내가, 내 수준보다 한 단계 위의 수학 문제집을 보수동 한 책방에서 덜컥 사버렸으니 말이다. 그것도 이 서점, 저 서점, 아직 가시지 초봄의 매서운 바람을 맞아가면서 고르고 고른 문제집이었다. 그때는 안 되는 건 마음 편히 포기해버리고, 잘하는 것에 매진하는 요령을 익히지 못했던 때였다. 대신 안되는 것도 노력만 하면 잘 할 수 있다는 이상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라는 말은 정말 이런 때에 써줘야 하는데, 그 문제집은 내 손에 들어온 뒤, 햇빛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학교 진도도 따라가기에 바빴던 내가, 아니 솔직히 말해 새 친구들을 사귀고 노는 데에 바빴던 내가, 학교에서 검사도 하지 않는 문제집을 내 스스로 풀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제일 싫어하는 수학과목 문제집이었다.
이제는 새로운 반친구들이 더 많고, 예전 반친구들과 연락이 뜸해질 무렵,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 이 수학 문제집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펴보지도 않을 문제집, 다른 책으로 바꿔버릴까, 싶었다. 어차피 국어 선생님이 문제집을 사오라고 했으니 저걸 국어 문제집으로 바꾸면, 엄마에게서 받은 참고서 비는 그대로 굳는 거였다.
어느 토요일, 작정을 하고 보수동을 나갔다. 어느 책방에서 샀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가보면 기억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보수동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나드리었는데, 정작 나가보니 그 서점이 그 서점 같아 보였다. 주인아저씨가 내 기억과 비슷하다 싶으면, 가게 구조가 기억과 다르고, 가게 구조가 비슷하다 싶으면 아저씨가 아닌 아주머니가 주인이셨다. 어느 주말 오후쯤에 나간 길이 저녁 해가 질 무렵까지도 나는 그 서점을 찾지 못하고, 기웃 기웃 거리기만 했다. 나는 점점 다리가 아파왔고, 다리보다 눈이 어질어질 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쳐버린 나는 제일 비슷해 보이는 서점으로 들어갔다. 하는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냥 아무 서점에 들어가서 책을 환불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오십대쯤 되었을까. 흰머리가 희끗희끗하신 아저씨가 주인인 작은 서점이었다. 작은 서점이었으므로 어린 마음에 만만하게 보았던 점도 있었던 듯싶다. 나는 주인아저씨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이거, 잘 못 샀는데, 돈으로 바꿔주세요.”라고 후딱 말해버렸다.
주인아저씨는 책을 이리저리 보시더니, 천천히 말씀하셨다. “이거 우리 서점에서 산거, 맞니?” 나는 “예.” 대답을 했다. 아저씨는 책 윗면, 밑면을 자세히 보시더니 “그래, 우리 서점에서 사갔다고 하니, 바꿔줘야지.” 말씀하시더니 이천 오백 원을 내 손에 쥐어 주셨다. 나는 고맙습니다! 인사도 하지 않았다. 보수동 사거리 건널목을 건넌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날 건널목을 지나오면서, 문제집의 문제는 하나도 못 풀었지만, 수학 문제집의 처리 문제는 풀었다는 안도감과, ‘어른도 별거 아니네.’ 하는 약간의 짜릿함도 함께였다. 그날 밤은 어찌나 보수동을 헤매고 다녔던지, 잠자리에 누워서 눈을 감아도 책장 가득 꽂힌 책들이 어른어른 거렸다.
11. 08. 4337 by kitchen 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