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지 않는 수학문제집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용돈이 주는 달콤함에 빠져 있던 나는 그로부터 며칠 뒤,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몰랐는데 대부분의 참고서 윗면, 혹은 밑면에는 판매한 서점의 고무도장이 찍혀 있었다. 아무리 작은 서점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주인아저씨는 내 예상과 달리 문제집 안부터 펼쳐보지 않고, 밑면, 윗면을 봤던 거였다. 정작 속아 넘어간 건 주인 아저씨가 아닌,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인아저씨는 알면서도 그 책 정가 그대로 돈을 내게 도로 주셨던 거였다.
아... 나는 그만 머리가 하얘졌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알아차린 거였는데, 그날 나는 이불을 얼굴끝까지 덮어쓴 채 잠이 들었다. 내 머릿속의 카세트 플레이어는 고장이 나버렸는지, 주인아저씨의 그 말만 계속 내 귓가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그래, 우리 서점에서 사갔다고 하니, 바꿔줘야지. ... 사갔다고 하니, 바꿔줘야지.
그 뒤로 간혹 보수동에 나갈 일이 있었지만, 그 집은 피해서 다녔다. 범인은 범행현장에 꼭 한번은 다시 나타난다는 불문율처럼, 그 집에 그 아저씨가 계신지 기웃거리기도 해보았지만, 아저씨가 돌아 보시라도 하면 후다닥 도망을 갔다. 그리고 그 집에서 책을 사는 일은 당연히 없었다.
음악에 푹 빠져서 음악잡지를 사기 위해 보수동 골목을 자주 들락거렸던 고등학교 때도 나는 그 집을 피해 다녔다. 행여나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면, 중학교 때의 그 일이, 아저씨의 아무것도 없던 그 말투가 생각나서 혼자서 얼굴이 발개지곤 했다. 아저씨는 내 얼굴을 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집 근처를 지날 때면 내 행동은 내가 봐도 어색했다.
그리고 대학 다닐 때, 만화에 빠져서 만화책을 구하기 위해 보수동 골목을 뒤지고 다닐 무렵에는 긴장하지 않고 보수동을 다녔다. 참고서를 취급하는 서점에는 들를 일이 도통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만큼 그때의 기억이 희미해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금 그 집이 어디인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없다. 서점 이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대충 위치라도 기억이 날 법한데, 기억에 없는 것을 보니, 어쩌면 내가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워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하지만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두 가지이다. 듣는 순간 날 뜨끔하게 만들어 버린 주인아저씨의 정직한 목소리와 문제집 금액, 이천 오백 원이다. 그 외의 기억은 사실 확신하지는 못한다. 중 2때였는지, 중 3때였는지, 혹은 새학기가 시작된 봄인지, 2학기가 시작되는 가을인지, 오후부터 저녁까지 헤맸는지, 아침부터 오후까지 헤맸는지, 대략적인 기억만 있지만, “그래, 우리 서점에서 사갔다니, 바꿔줘야지.”주인 아저씨의 말씀과 이천 오백 원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지금도 그때의 생각처럼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나는 한 가지 이해가 잘 안되는 게 있다. 그 주인아저씨는 무슨 마음으로 내게 이천 오백 원을 도로 내주셨을까. 자신의 서점 책이 아닌데도, 왜 내게 돈을 거슬러 주셨을까. “여길 보렴. 다른 책방에서 산거잖니?! 그 책방으로 가봐라.”하셨어도 충분히 될 법한 일인데도 말이다.
대충 이런 이야기의 마무리라면, “지금이라도 그 아저씨를 꼭 만나서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는 게 정석이고, 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해야 할 도리일 지도 모르겠지만, 난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다.
그 주인아저씨는 그저 날 믿어준 거였다. 난 이천오백 원보다 그 믿음에 지금도 마음이 뜨끔하다.
11. 08. 4337 by kitchen gard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