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불렀기에, 나는 항상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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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민 2008-09-26 21:12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라는, 어렸던 나의 한 마디를 들으신 아빠 덕분에 나는 보수동 책방 골목에 첫 발을 딛었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자 보이는 것은, 조금은 생소한 풍경. 좁다란 골목에 여기저기 잔뜩 들어선 책방과 즐거워 보이는 사람들과, 코끝을 스치는, 당시에는 몰랐던 책의 향. 내 손을 쥔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여기저기 봐도, 봐도 끝이 없는 책들을 하나하나 살펴갔다. 당황한 얼굴의 아빠를 뒤로 하고.
어렸을 적부터, 책 읽기를 워낙 좋아하던 나였기에 그 전에도 서점은 많이 가 보았다. 서점도, 보수동 책방 골목도 책을 판다는 점에서는 다른 게 없다. 그런데 어린 날의 나는 왜 아빠의 손마저 뿌리 친 채 그리도 기쁜 듯 한 얼굴로 보수동 책방 골목을 거닐었을까. 시간이 꽤나 지난 지금 그 때의 느낌을 정확히 나타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 뭐랄까.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펼쳐지는 책들의 향연. 그 골목의 앞에 선 순간, 뭔가가 나를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 라고 묻는 다면 지금의 나는 물론 그 때 그러한 느낌을 받았던 나조차도 정확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는 ‘책 사세요!’ 라고 소리쳐 장사하시는 분들은 안 계신다. 그분들은 항상 책을 소중히 해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만 책을 건넬 뿐, 억지로 권하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어린 나에게 말을 건 것은 무엇인가? 홀린 듯 책방을 거닐던 나에겐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이기에,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높게, 높게 쌓인 책들과 책방의 한 켠에서 책을 추천해주시는 분들, 소중히 책을 품에 안은 사람들. 아마, 그것들일 것이다. 나를 부르고, 나의 발을 잡은 것은.
시간이 흐른 뒤, 지금 나는 보수동 책방 골목과 그렇게 가까운 위치에 살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해가 져서야 귀가하는 대한민국의 고등학교의 학생으로 보수동 책방 골목을 찾으려면 항상 조금 무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학교 앞에도 집 앞에도 서점은 있다. 그러나 나는 항상 보수동 책방 골목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 아니, 그 틀림없이 그곳이 단지 책만 있는 곳이 아닌, 책도 있고, 책을 소중히 하는 이도 있고, 인심 좋은, 책 냄새뿐만 아니라 사람 냄새를 물씬 풍기는 책들의 주인 분들이 계시는 곳이기 때문에. 그 분들께서 ‘아냐, 우린 안 불렀어!’ 라고 말하시면 난 조금 곤란할 지도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그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는 부름에 답하고 있다. 보수동 책방 골목. 그곳은 단지 ‘책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다.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득 있는 곳. 책 냄새도 사람 냄새도 향기로운 곳. 그런 곳에서 나를 불렀기에, 나는 오늘도 보수동에 간다.